호남신학대학교 발전기금
SINCE 1955 · FUND.HTUS.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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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은 스물넷.영혼은 스물여섯.─ 그 숫자 사이의 간극에, 우리의 빚.

1913년 4월, 미국 남장로교 코잇(R. T. Coit) 선교사 부부 단 하루 사이로 두 자녀를 잃었다 ─ 4월 26일 딸 Roberta(만 1세), 다음 날 4월 27일 오빠 Thomas(만 3세). 슬퍼할 겨를도, 온전한 비석을 하나 더 세워줄 여력도 없어 한 무덤에 두 아이를 함께 묻었다. 그래서 양림의 그 자리 비석은 펼친 성경처럼 두 페이지로 누워 있다 ─ 왼쪽에는 누이의 이름, 오른쪽에는 오빠의 이름. 부부는 찢어지는 가슴에 두 아이를 묻고, 다시 일어나 조선의 가난한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 묵묵히 걸어 갔다. 그분들이 떠난 자리에서, 우리는 매일 강의를 시작한다.

楊林Mulberry Grove · 1898 — Now
24 Graves · 26 Souls · 양림 선지동산 묘역

스물네 비석.스물여섯의 영혼.그 숫자 사이의 간극에 — 우리의 뼈아픈 빚.

호남신학대학교 양림의 언덕에는 스물네 개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하지만 그 차가운 흙 아래 잠들어 있는 생명은 모두 스물여섯 분이다. 그 차이를 만든 한 비석이 있다. 1913년 4월, 미국 남장로교 코잇(R. T. Coit) 선교사 부부는 단 하루 사이로 두 자녀를 잃었다 ─ 4월 26일에 딸 Roberta Cecil Coit(만 1세, 1911. 9. 7 — 1913. 4. 26), 다음 날 4월 27일에 오빠 Thomas Hall Woods Coit(만 3세, 1909. 9. 14 — 1913. 4. 27)을. 슬퍼할 겨를도, 온전한 비석을 하나 더 세워줄 여력도 없어 한 무덤에 두 아이를 함께 묻었다. 그래서 양림에 이장된 그 자리의 비석은 펼친 성경처럼 두 페이지로 누워 있다 ─ 왼쪽 페이지에 누이 Roberta, 오른쪽 페이지에 오빠 Thomas. 부부는 찢어지는 가슴에 두 아이를 묻고, 다시 일어나 조선의 가난한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 묵묵히 걸어 갔다.

훗날 본인이 순직했을 때, 선교사들은 먼저 묻은 아내와 자녀 곁으로 돌아왔다. 유진벨의 첫째 부인 로티 벨의 가묘와 자녀들이 그렇게 그의 곁에 자리한다. 그 뒤로도 광주기독병원 치과 과장 유수만(Dick H. Nieusma Jr.) 선교사와 부인 유애진(Ruth Joan Nieusma)이 ─ 2016년 부인이 자신의 86세 생일에 먼저, 2018년 남편이 그 뒤를 따라 ─ 양림에 한 비석 아래 합장되었다. 원래 목포 · 군산 · 광주 시내에 흩어져 있던 선교사 가족들의 유해도 호남신학대학교 선지동산 묘역을 성역화하는 과정에서 한 자리로 이장되었다. 처음에는 스물한 비석에 스물두 분, 훗날 양림으로 돌아온 분들이 더해져 스물네 비석 아래 스물여섯 영혼이 한 흙을 베고 누운 자리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 자리는 위인들의 무덤이 아니다. 타국 땅에서 어린 자식들을 가슴에 묻어 가면서도 조선의 백성을 향한 사랑과 사명을 포기하지 않은 분들의 피눈물 나는 희생이 고스란히 담긴, 영적 성지(聖地)다. 우리가 시작하는 「오병이어 선교사 운동」은 이 스물네 무덤, 스물여섯의 영혼 — 특히 일찍 하늘로 간 어린 자녀들의 숭고한 희생 위에 빚어진 빚을 갚는 거룩한 화답이다.

그 눈물의 자리에 오늘 우리의 신학생들이 서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 빚을 갚기 위해, 오병이어를 들고 그 곁에 서겠습니다.

─ 오병이어 선교사 운동
楊林24 graves · 26 souls · five loaves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nited States · 미국남장로교 문장
Lux Lucet in Tenebris

빛이 어둠 속에
비치다.

요한복음 1:5

양림 선지동산 묘역에는 미국 남장로교(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nited States)의 문장(紋章)이 새겨진 한 조형물이 서 있다. 12세기 왈도파 종교개혁부터 16세기 유럽 종교개혁(The Reformation)까지의 역사와 신앙고백을 담은 문장 ─ 그 모든 것의 바탕에 한 줄의 라틴어가 새겨져 있다. 「LUX LUCET IN TENEBRIS · 빛이 어둠 속에 비치다」.

방패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비둘기

성령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떨기나무

불타는 떨기나무 · 하나님의 임재

등잔

세상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증거

월계관

교회의 승리와 신앙고백

종교개혁의 후예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이 땅이 어둠에 잠겼을 때 복음을 들고 찾아와
한국인들의 벗이 되었고, 밀알이 되어 여기에 묻혔습니다.

─ 양림 선지동산 묘역 안내판
01 / 07 · ERA 1
오 웬
Clement Carrington Owen
· 오원 ·
Lived
1867 — 1909 · 향년 41세
Passing · 별세·안장
1909 별세 · 양림 안장
Calling
의사 · 목사 · 양림에 가장 먼저 묻힌 자
Epitaph · 碑銘
"길 위에서 만난 한 사람도 외면하지 않겠다."
오웬이 한국으로 떠나며 다짐한 말
Vita · 사적(事跡)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의사이자 목사 안수를 함께 받은 드문 사역자였다. 1898년, 광주 선교부의 첫 의료 사역을 짊어지고 한국에 입국했다.

말 등에 의약품을 싣고 전남 각지를 돌았다. 처방전과 복음이 한 자리에서 건네졌고, 진료실은 늘 길 위에 있었다.

1909년 봄, 장흥에서 환자를 진료하다 급성 폐렴에 걸렸다. 동료들이 그를 광주로 옮기는 험한 길 위에서도 그는 자신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환자들을 위한 기도를 청했다.

광주에 도착하자마자 소천. 양림에 가장 먼저 묻힌 첫 선교사가 되었다. 양림동에 세워진 「오웬기념각」 은 오늘도 그의 길을 따른 이들을 그 자리에 모은다.

02 / 07 · ERA 1
유진벨
Eugene Bell
· 배유지 ·
Lived
1868 — 1925 · 향년 57세
Passing · 별세·안장
1925 별세 · 양림 안장
Calling
전남 선교의 아버지 · 호남 신학의 뿌리
Epitaph · 碑銘
"호남은 내가 받은 사명이고, 내가 묻힐 자리이다."
두 번의 사별 뒤에도 호남을 떠나지 않은 유진벨이 남긴 말
Vita · 사적(事跡)

1895년, 27세의 나이로 한국에 입국. 목포 선교부를 거쳐 광주 선교부를 개척한 「전남 선교의 아버지」.

첫 부인은 1901년, 두 번째 부인은 1919년에 한국에서 먼저 잃었다. 두 번의 사별을 짊어진 채로도 그는 호남을 떠나지 않았다.

숭일학교(1907)와 수피아여학교(1908)를 세웠고, 제중원(현 광주기독병원)의 토대를 놓았다. 그가 양림에 뿌린 신학과 교육의 씨앗 위에서 호남 장로교가 자랐고, 그 줄기 위에 호남신학대학교가 서 있다.

1925년 9월, 광주의 사역 현장에서 심장마비로 갑작스레 소천. 그가 사랑한 양림에 잠들었다.

03 / 07 · ERA 1
서서평
Elisabeth J. Shepping
· 서서평 ·
Lived
1880 — 1934 · 향년 54세
Passing · 별세·안장
1934 별세 · 광주 시민장 · 양림 안장
Calling
조선의 테레사 · 광주 최초의 시민장
Epitaph · 碑銘
"Not success, but service."
성공이 아닌 섬김 ─ 서서평의 묘비명
Vita · 사적(事跡)

독일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민, 간호학을 배운 뒤 1912년 한국에 입국. 광주 양림동을 거점으로 여성과 아동, 한센병 환자, 거리의 고아들 곁에서 평생을 살았다.

평생 무명옷에 고무신을 신었다. 한 끼 식사도 같이 사는 이들과 나누었다. 가난한 자들과 같은 자리에서 같은 것을 먹고 입었기 때문에, 그녀를 따르는 이들이 늘었다.

이일학교(현 한일장신대)를 설립해 여성에게 교육의 자리를 열었고, 대한간호협회 초대 회장으로 한국 간호의 토대를 놓았다.

1934년 6월, 영양실조와 과로 끝에 소천. 마지막 남긴 모든 재산은 동전 7전과 강냉이 가루 두 홉뿐이었다. 광주 최초의 시민장으로, 수많은 시민이 거리에 나와 그녀의 마지막을 배웅했다.

04 / 07 · ERA 3
이철원
Ronald B. Dietrick, M.D.
· 디트릭 ·
Lived
1927. 2. 18 — 2015. 1. 30 · 광주기독병원 제7대 원장
Passing · 별세·안장
2015 별세 · 양림 안장
Calling
광주기독병원 외과 전문의 · 제7대 원장 · 수피아간호학교 설립
Epitaph · 碑銘
"A Life of Dedicated Service — 헌신적인 봉사의 일생."
양림 선지동산 묘역 이철원 묘비 · 미가 6:8
Vita · 사적(事跡)

본명 로널드 디트릭(Ronald B. Dietrick, M.D., 1927. 2. 18 — 2015. 1. 30). 미국 데이비슨 대학을 졸업하고 펜실베이니아 의과대학을 마친 외과의. 1958년 부인과 두 자녀와 함께 미국 남장로교 의료선교사로 한국에 입국했다.

1961년 9월 광주기독병원 외과 과장으로 부임, 1967년 제7대 원장으로 취임. 광주기독병원을 미국 남장로교 선교회 재단에서 분리해 독자 경영의 기반을 닦았고, 다양한 진료과를 갖춘 종합병원 · 수련병원으로 키워 체계적인 기독 의료인 양성의 길을 열었다.

기독교인 간호사 양성을 위해 「수피아간호학교(현 기독간호대학)」 설립의 중추가 되었고, 방사선사 · 임상병리사 · 치과 기공사 수련 제도를 도입해 지역의 보건의료인을 길렀다. 광주 · 전남의 무의촌 순회진료, 모자보건 교육, 전염병 예방 교육을 꾸준히 펼쳤다.

특히 소아마비로 후유장애를 겪는 어린이들을 위해 소아마비 백신을 들여와 광주 지역 어린이들에게 직접 주사하여 소아마비를 퇴치한 사건은 호남 의료사의 한 페이지가 되었다. 1980년 5월, 그는 광주기독병원 원장으로 재직하며 병원으로 밀려드는 총상 환자들을 밤낮 가리지 않고 수술했다.

1986년 선교사직 은퇴 후 미국 귀국. 「현대의학과 선교명령」 등 저술과 2005년 「광주기독병원 100년사: 선교사시대」 출간으로 선교사 후학들을 격려했다. 2015년 1월 30일 별세. 평생을 사랑하고 피 흘려 헌신했던 광주를 잊지 못해 ─ 편안한 고국이 아닌 양림 선지동산 묘역에 영면의 자리를 택했다. 묘비에는 미가 6장 8절과 함께 「헌신적인 봉사의 일생」이라는 한마디가 새겨져 있다.

05 / 07 · ERA 3
유수만
Dick H. Nieusma Jr., D.D.S.
· 뉴스마 · 부인 유애진(Ruth Joan Nieusma, 1930. 4. 23 — 2016. 4. 23) ·
Lived
1930. 9. 20 — 2018. 7. 7 · 부인 유애진과 부부 합장
Passing · 별세·안장
2018 별세 · 부인 합장
Calling
광주기독병원 치과 과장 · 외국인 최초 한국 치과의사 면허 · 호남 치의학의 아버지
Epitaph · 碑銘
"미국 남장로회 파송 · 광주기독병원 치과의료선교사 1961~1986."
양림 선지동산 묘역 유수만·유애진 부부 합장 묘비
Vita · 사적(事跡)

본명 딕 H. 뉴스마(Dick H. Nieusma Jr., D.D.S., 1930. 9. 20 — 2018. 7. 7). 미국 미시간주 홀랜드 출생. 미시간대학교 치과대학을 졸업한 뒤 주일미군으로 복무하면서 선교사의 길을 결심했다. 콜롬비아신학교에서 선교 훈련을 마치고 1961년 9월 서울에 도착했다.

2년간 연세대학교 한국어학당에서 한국어를 배우면서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한국 치과의사 면허를 취득. 1963년 광주기독병원에 부임해 1986년까지 23년 동안 치과 전공의 수련과정을 개설하고, 정기 무의촌 진료 봉사와 암환자 특수 보철 치료에 매진했다.

호남 최초의 「조선대학교 치과대학」과 「광주보건전문대학 치위생과」 개설에 앞장섰다. 1982년 그가 미국으로 돌아간 뒤, 그의 제자들과 서울대생들이 그해 3월 치과의료선교회를 설립해 그의 정신을 이어 받았다.

미국 귀국 후에도 네브래스카 치과대학 교수로 후학을 길렀고, 은퇴 후에는 이동식 치과 차량을 개발해 북한 의료봉사에 보내는 일까지 멈추지 않았다.

평생의 동역자였던 부인 유애진(Ruth Joan Nieusma)이 먼저 2016년 4월 23일 ─ 자신의 86세 생일 그 날에 별세했다. 2년 뒤 2018년 7월 7일, 유수만도 그 뒤를 따랐다. 두 분은 양림 선지동산 묘역에 한 비석 아래 합장되었다. 묘비에는 「미국 남장로회 파송 · 광주기독병원 치과의료선교사 · 1961~1986」이 새겨져 있다.

06 / 07 · ERA 3
허철선
Rev. Charles Betts Huntley
· 헌틀리 · 부인 허마르다 생존 ·
Lived
1936. 7. 9 — 2017. 6. 26 · 미국 장로교 선교사 1965~1985
Passing · 별세·안장
2017 별세 · 2018 양림 안장
Calling
광주기독병원 원목 · 5·18 진실의 기록자 · 시민의 은신처
Epitaph · 碑銘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
시편 116:15 · 양림 선지동산 묘역 허철선 묘비
Vita · 사적(事跡)

목사 허철선 박사(Rev. Charles Betts Huntley, 1936. 7. 9 — 2017. 6. 26). 미국 장로교 선교사로 1965년부터 1985년까지 호남에서 사역. 광주기독병원 원목이었다.

1980년 5월, 계엄군에 쫓겨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한 시민들과 학생들을 자신의 사택 지하실에 숨겨주며 든든한 보호막이 되었다. 그는 광주가 가장 두려워하던 그 밤에, 영적 방파제가 되었다.

목회자이자 사진가였던 그는 광주의 참혹한 현실을 직접 사진으로 기록했고, 그 필름들을 신발 밑창이나 과자 상자 속에 몰래 숨겨 외국으로 반출했다. 군부의 철저한 언론 통제를 뚫고 광주의 진실을 전 세계에 알린 결정적 손이 그 손이었다.

2017년 6월 26일 미국에서 소천. 「광주에 묻히고 싶다」 는 간절한 유언을 따라 이듬해 2018년 5월, 수많은 광주 시민들의 눈물 어린 애도 속에서 양림 선지동산 묘역에 안장되었다. 묘비에는 시편 116편 15절이 새겨져 있다 ─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

부인 허마르다(Martha Huntley) 선교사는 오늘도 미국에서 살아 계신다. 남편을 양림의 비석 사이에 먼저 묻어두고, 머나먼 타국에서 호남 땅을 위해 눈물로 중보하며 그 뜻을 곁에서 지켜내고 계신다. 양림은 그래서 여전히 살아 있다.

1980 May · 2018 · 2021 · Still — 양림은 멈추지 않는다

양림은화석이 아니다.

1980 May · Sutured
이철원 — 외과의사

총상 환자를 밤낮 가리지 않고 수술한 광주기독병원장. 「의사의 본분은 생명을 살리는 것」

1980 May · Healed
유수만 — 치과의사

여수 애양원과 무의촌을 직접 돌며 가난한 이웃의 미소를 되찾아 준 호남 치의학의 아버지

1980 May · Witnessed
허철선 — 원목 · 교수

시민들을 사택 지하에 숨기고, 필름을 신발 밑창·과자 상자에 숨겨 광주의 진실을 세계로 보낸 영적 방파제

1980년 5월, 광주의 같은 자리에서 피 흘리며 함께 감당했던 세 분. 은퇴 후 편안한 고국 땅을 마다하고, 죽어서라도 다시 이 양림의 흙바닥으로 돌아오신 자리. 그리고 허철선 선교사의 부인 허마르다(Martha Huntley) 사모님은 오늘도 미국에서 살아 계신다. 남편을 양림의 비석 사이에 먼저 묻어두고, 머나먼 타국에서 호남 땅을 위해 눈물로 중보하며 그 뜻을 곁에서 지켜내고 계신다.

100년 전 선교사들의 희생뿐만 아니라,
1980년 5월 광주의 아픔을 함께 피 흘리며 감당했던 이철원, 유수만, 허철선 선교사님 굳이 편안한 고국을 버리고 이 양림의 흙바닥으로 돌아와 묻히셨습니다.
그분들이 지켜낸 광주, 그분들이 사랑한 호남신학대학교를 이제는 우리가 지켜야 합니다.

─ 오병이어 선교사 운동 · 발기문 II
Third Garden · 묘비 위에 자라난 신학

묘비 위에서신학이 자랐다.

1955년, 스물네 비석을 품은 양림 선지동산 한쪽에 신학교가 세워졌다. 한 알의 밀이 죽어 30배, 60배, 100배가 되었다는 그 말이, 캠퍼스 중심에 묘역이 남아 있다는 사실로 매일 증언된다. 비석 옆에서 강의가 시작되고, 비석 옆에서 기도가 끝난다. 그 자리에서 다시 한 알을 더 심는 일이 디모데 프로젝트다.

Inspire
씨앗 ─ 묘비를 그리다

입학 첫 학기, 학생은 양림 선지동산 묘역에 잠든 스물네 비석 앞에 선다. 자신이 받은 부르심을 묘비명 한 줄로 적는다.

Reflect
물 ─ 거울을 닦다

중간 학기마다 학과별 디모데 모임. 자신의 한 줄 묘비명을 돌아보고, 다듬는다. 영적 거울을 닦는 일.

Plow
추수 ─ 흙을 갈다

졸업 직전, 스물네 자리 앞에서 사역 헌신을 선포한다. 흙을 갈고 다음 한 알을 심는다.

디모데 신입생 모집 안내묘비 위에 자라난 신학에 한 알 더
1898 → 2025 · 한 줄 연표

한 줄로 보면,
127년이 한 자리에 있다.

  1. 1898
    유진벨 입국 · 양림 선교부 시작
  2. 1909
    오웬 안장 — 양림에 가장 먼저
  3. 1913
    코잇 선교사 부부, 두 자녀 단 하루 사이로 잃다 — 책 모양 한 비석
  4. 1925
    유진벨 안장 — 호남 신학의 뿌리
  5. 1934
    서서평 안장 — 광주 최초의 시민장
  6. 1955
    호남신학교 개교 — 비석 옆에서 강의가 시작되다
  7. 1958
    이철원(디트릭) 입국 — 광주기독병원 외과로
  8. 1961
    유수만(뉴스마) 입국 — 외국인 최초 한국 치과의사 면허
  9. 1967
    이철원 광주기독병원 제7대 원장 취임 — 독자 경영 기반
  10. 1980
    5·18 — 이철원(외과) · 유수만(치과) · 허철선(원목)이 같은 자리에 서다
  11. 2015
    이철원 별세(1. 30) — 양림 선지동산 묘역에 영면 · 「헌신적인 봉사의 일생」
  12. 2016
    유애진(Ruth Nieusma) 별세 — 86세 생일(4. 23) 그 날에
  13. 2017
    허철선 소천(6. 26) — 「광주에 묻히고 싶다」
  14. 2018
    허철선 양림 안장(5월) · 유수만 별세(7. 7) 후 부인 유애진과 합장
  15. 2025
    70주년 · 디모데 프로젝트
Plant · 한 알을 심다

스물네 비석, 스물여섯 영혼.
그 곁에 설
오병이어.

양림 선지동산 묘역의 스물네 비석, 그 아래 스물여섯 영혼이 시작한 기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안드레의 손에 들렸던 어린아이의 작고 초라한 보리떡 하나가 오천 명을 살렸음을 우리는 안다. 오늘 당신이 내놓는 한 알의 오병이어는 외로운 광야에 서 있는 한 명의 신학생 곁에 함께 무릎 꿇고 기도하는 「끊어지지 않는 생명줄」이 된다.